일상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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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까하다 말았다/만다. 전화를 할까하다 말았다/만다.
숨을 쉴까하다 말았다/만다. 그래도 숨은 쉰다.

11:20. 공부를 하고 있겠지. 책을 읽고 있거나, 과제를 하고 있거나, 프로젝트를 하고 있거나...
아침은 먹었을까. 우유만 한잔 마셨을까. 달리기 했을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라는 생각을 하는 중에, 난데 없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00:23. 잘 시간 아니던가? 기억한다 혹은 기억하지 않는다. 일과표가 어디 있더라. 언제 일과표를 살폈더라. 일과표가 있었던가. 일과표가 뭐더라.
언제부터 뭘하면서 살아있는 것이지? 아니면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렸나. 그럼 말을 바꿔, 언제까지 뭘하다가 죽은 것이고, 지금은 죽은 상태에서 뭘하고 있는 것이지?
아무래도 나는 지금 죽어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지금 정확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의심한다. 그래, 죽어있다고 치자, 그럼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다시 살아야하나? 아니면 썩어야하나? 혹은 어떻게 되어야하나? 살게 되어야하나? 썩게 되어야하나?

여자친구가 전부는 아니예요.
임지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아마 네 말이 맞겠지.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것을 알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내가 느끼고 있는, 지각하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지금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다.
선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정말 힘든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리고 그렇게 느껴. 네가 정말 옳아.
그리고 또, 선배. 후회 하지 마세요. 단지 지금 즐거운 것을 그대로 느끼세요.
그래, 그 말도 맞아. 그래야지. 아마도 그 쪽은 네가 나보다 선배이겠지. 충고 고마운데, 그리고 동의하는데, 구체적인 방법 좀 알려줘. 도대체 어떻게 버텨야할 지 모르겠네. 내가 그간 너 많이 가르쳐줬잖아. 컴퓨터에 대해서 모르는 것 있을 때마다 도와주고, 전에 C 언어도 가르쳐 줬잖아. 너한테 그거 이해시키는 것 정말 어려웠거든.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는 것 하나만 좀 알려줘. 지금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니?

칼로 배를 쑤셔도 그 아픔에 "으악"하고 소리를 지를텐데. 지금 이 극심한 고통에도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언제부터인 지 모르지만,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보다. 그러면서 빠져나오기 위해, 뭐라도 잡아보려고 이리저리 손을 휘저어보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나보다. 그러다가 굵은 동아줄을 잡게 되었고, 잠시 평안을 얻었나보다. 하지만 그 마저도 끊어진 것 같다. 혹은 그 동아줄 마저도 늪에 빠져버린 것 같다. 동아줄에 대한 의지(依支)가 무너졌을 때 이미 늪에 입까지 잠기어 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겠지.

술을 마실까 하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그러다가 말았다. 아무리 술을 마신들 그게 해결책이랴. 배고픈 아기에게 감정(甘精, saccacharin)물을 마시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에라, 잘 됐다. 슬픈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을 때에 미치도록 느껴보자. 그 마저도 없다면 완전히 잊게 되는 것 아닐까? 기억이 있으니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닐테지만, 좋아하는 감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슬픈 감정이라도 계속 된다면, 그것은 좋아하는 감정이 계속 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시간이 지나 좋아하는 감정이 더 이상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리움이라는 이름이라도 붙일 수 있겠지.
즐겨보자, 슬픈 감정이라도. 그리고 후회하지 말아야지. 슬픈 감정이라도 즐기는 것, 그것이 나의 기다림이어야한다면 그래야지. 나는 이렇게 한발짝 우주 외계인으로...

오늘도 이렇게 스스로 괴롭히며 기다리는구나.

http://weblog.youre.space//vergence/2004/09/0001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