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의 변화

  • 말투가 바뀜
  • 의식하고 있음
  • 전하고 싶음
  • 문학, 예술에 대한 이해의 확장

요 얼마부터 블로그에 쓴 글의 말투가 바뀌었다. 단순히 나에 대한 독백(獨白)의 말투가 아니고, 너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말투가 되었다.
블로그의 이름을 바꿀까 생각 중이야. "daily life of vergence"에서 "고백(告白)" 정도로... 고하다(말하다)는 의미의 고(告), 사뢰다(말하다)는 의미의 백(白). "고한다"와 "사뢰다"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 너에게 하는 한마디 한마디 모두 소중하고 조심스러우니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고백의 내용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겠지.
말투가 바뀐 것만큼 나에게 전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 근래만큼 많이 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근래만큼 많이 "흐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해야할까.

전에는 글을 쓸 때에 나의 생각을 조리(條理)있게 표현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감정의 표현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마도 너를 의식(意識)하고 있어서이겠지?

네가 보든 안 보든, 전하고 싶다, 이런 느낌과 생각 모두를. 말이라는 것이 엉성해서 모두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너는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하니까, 짧은 한마디로도 전달이 될 것 같아.

새로운 - 아마도 새로운 것이겠지. 우선 논리적으로 같은 것은 없는 데다가, 너라는 유일한 대상에 대한 느낌은 당연히 새로운 것일테니 - 느낌들을 통해서 문학, 예술에 대한 이해가 확장된 것 같아. 십년 가까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근래에 새롭게 들리고, 그 의미도 풍성하게 느껴져. 소설이나 시에서 느꼈던 것을이 단순히 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어느 가요의 가사에도 이런 비슷한게 나왔던 것 같은데... 너를 좋아하게 되니,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얘기 같다고.
산에가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악한 인물들의 심정이 이해되었어. 음, 어떤 예(例)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소설을 잘 안 읽어서 마땅히 들 예가 없네. 영화에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Anakin Walker)가 다쓰 베이더(Darth Vader)가 된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세상 모든 생물이 죽는다고 해도, 너를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마음. 그것이 조금만 방향을 잘 못 잡아도 큰 일이 나겠지. 왜냐하면 너를 갈구(渴求)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할테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나를 빼고, 세상 모든 인간을 죽인다면 나는 너를 완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무섭지? 물론 단 둘이 남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 너를 향한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꿈을 꾸었는데, 이건 정말 무섭네. 자살을 하려고 해. 그리고 유서에 이렇게 썼어. 내 시체를 박제(剝製)로 만들어서 너에게 보내달라고. 그러면 네가 조금 덜 외롭지 않을까. 헌데, 싸늘해서 좀 힘들겠지?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