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관과 객관
- 나와 너
- 이질성과 분열
- 분열과 통합: 바른 해결책은?
- 분열과 통합의 양상
- 분열의 허상
- 요지: 우리의 문제
흔한 일일지라도 그것이 각각의 경우가 될 때에는 모두 특별하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라는 일반적인 명제가 있고,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라는 특별한 명제가 있을 때, 뒤의 명제는 앞의 명제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주체의 입장에서.
특별한 경우를 단지 일반적인 경우처럼 볼 수도 있다. 나,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다시 말해 "모든 생물은 죽는다"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에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에 그의 아버지는 단지 객체이다.
때때로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나와 너로 나누고 그 문제를 너의 문제로 미루어버린다. 다시 말해 우리 전체를 작은 우리와 저들로 나누고 저들의 문제로 만든 다음, 저들에 대해 비난하면 작은 우리에게 오는 책임이 줄어든다.
정치를 보면, 부정한 정치가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정치가들을 우리와 동떨어진 집단으로 치부하고 비난하기 마련이다, 비록 그들이 나, 작은 우리를 포함한 전체의 우리에 속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 우리에 대해서 동질성이 결여될 경우,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분열이다. 다시 말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외국에서 온 그들로 치부하는 것이다. 또, 병역 비리에 대해 단지 그 비리와 연루된 사람들이 부정한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열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다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결국 저들의 문제는 곪아 터져 우리의 문제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해결책은, 작은 우리와 저들을 통합하여 우리 전체를 다시 찾고, 그 문제를 우리 전체가 함께 떠 맡는 것이다.
분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난할 수 있다. 자신이 공금(公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나를 우리로 생각하지 않는 우리 전체 중의 일부는 나를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우리로 생각하는 우리 전체 중의 일부는 그 문제에 대해 동정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접하는 우리의 분열은 대부분 헛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0년 8월 말 정도. 밤 늦게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정류장에 정차한 두 버스 사이에 있던 오토바이가 불행히도 사고를 당했다. 오토바이엔 아버지, 8살 정도 되어보이는 딸, 3살 정도 되어보이는 딸이 타고 있었던 것 같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큰 여자 아이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두개골이 손상되었다. 그 모습을 본 한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어머, 우리 아기 어떡해!
그 때엔 그 아주머니가 왜 "우리 아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여자 아이는 그 아주머니의 친딸이 아니었다.
지금에와서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 진정 "우리"의 아기였고, 여전히 그렇다.
그 때에 그 아주머니가 느낀 것은 무엇이겠는가. 충격은 물론이고, 안타까움, 슬픔 등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기가 죽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아이를 단지 누군가의 딸이라고 여긴 사람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보기 흉한 꼴을 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기가 죽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우리의 문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