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정서, 술, 노래
- 논문 쓰기: 참고 논문 읽기, 책 읽기
아무래도 그렇게 길러진 것일까? 비를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얀 하늘을 보면 편안함이 느껴진다. 맑은 날 화사한 햇빛에선 무언가 강한 느낌을 갖는다. 상쾌함,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편안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비를 보면 머리 속에서 천천히 순서대로 말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천천히 형성된 일종의 연계 체계라고 할까. 비를 보는 순간, 편안함, 느긋함, 끈적함, 안정감 그런 것을 한꺼번에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술. 냉장고에 있는 캔 맥주 두 박스, 손을 좀 대볼까 했는데, 막상 꺼내려고 하니 내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맥주는 내 취향이 아닌가. 막걸리나 청주를 좀 마실까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려고 보니 흥이 안 났다. 또, 뭐 다른 먹을 거리가 없어서. 몇잔 마시지도 않을 것이고 해서, 참았다.
딱히 정해 놓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조건이 되면 마냥 하는 그런 것이 정해진 것 같다. 10월에는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듣고, 비가 오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듣는다. 가끔 친구 생각이 나면 조용필의 “친구여”. 오늘도 비가 오는 날이다. 역시나 “비처럼 음악처럼” 들었다. 컴퓨터를 켜고, 초필살 무한 반복. 음악을 들으니, 술 마시고 싶은 마음이 좀 가셨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오고 있었다. 축축함, 흐림. 수업이 없어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생각하니 비 안 맞게 되어서 오히려 즐겁기도 하고, 괜히 나가고 싶기도 하고 그랬다. 14:00 정도 되어서 산에 갈까 했는데, 비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가는 길 말고, 포장된 길로 가서 보문산 전망대 바로 밑에 있는 음식점에서 막걸리와 부침개를 먹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에 burnhard, Susanne과 함께 갔을 때, 막걸리 맛이 정말 좋았던 터라, 기억하고 있었다. 나가려고 우산을 들고 문을 열었는데, 왜 그랬을까? 나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래, 비 오는 날에는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
결국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지난 금요일, 어제 시험을 보았으니, 이제 논문에 신경을 써 볼까 했는데, 만만치 않았다. 논문 개요를 적당히 쓰고, 서론을 쓰기 시작했다. 전부터 서론은 이렇게 써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어서 쓸 내용은 걱정이 없는데,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 지 망설였다. ‘뭐 일단 쓰고 나중에 조금 고치지’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논문에서는 어떻게 시작을 했는지 참고하려고 이것 저것 뒤져 봤는데, 내용이 다르니 표현도 조금 다른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것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우선 책을 좀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글 쓰기를 그만 두었다. 책 얼른 읽고 내용을 풍성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책도 별로 못 읽었다.
사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그리고 어제 시험을 봤으니 좀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었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이렇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노는 길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오늘의 상황이라면, 마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의자에 힘 없이 푹 쳐져서 시간이나 보내면서 쉬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인가? 쳇.